올해는 휴스턴의 봄을 교당 안에서도 매일매일 보고 느끼고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참나무의 새순들, 그 옆에 따닥따닥 붙어있는 꽃가루, 바람이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꽃가루를 쓸어내느라 바쁘지만 거대한 나무가 안겨주는 아름다움의 향연에 비하면 그깟 일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력과 희망과 새로움을 안겨주는 이 봄이 은혜롭고 감사합니다.
요 며칠간 급격히 떨어진 기온에 ‘꽃샘추위’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꽃샘추위는 초봄이 지나 따뜻해지고 꽃이 필 때쯤 다시 날씨가 일시적으로 추워지는 현상으로, 봄꽃이 피는 걸 시샘한다 해서 꽃샘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속담에 ‘꽃샘추위는 꾸어다 해도 한다’ 고 하여 피해 갈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따뜻한 봄기운에도 완전히 가시지 않고 눌려 있던 찬 기운이 기회를 보아 다시 올라오는 것을 볼 때, 마치 우리가 어차피 받을 것은 다 받아야 변화가 되는 인과의 이치가 그 속에 있음을 배웁니다. 봄인가 하면 여름이 오는 휴스턴의 짧은 봄이 아쉬웠던 차에 며칠 간의 추위가 봄을 연장하는 것 같아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봄’이란 단어는 ‘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봄을 ‘보는’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만물이 깨어납니다. 깨어나면 눈을 뜨는 것과 같이 나뭇가지마다 잎눈에서 잎새가, 꽃눈에선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다 피어납니다. 땅에 묻혀 있던 풀씨도 어느새 깨어나 잔디밭 여기저기에 고개를 내밀고, 언제나 새잎이 나오려나 기다리게 하는 뒤뜰에 우뚝 서있는 피칸 나무 두 그루에도 비로소 싹눈이 틔어 새잎들이 쑥쑥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삼라만상이 부지런히 앞을 다투어 눈을 뜨는 계절인 봄에 우리가 삼라만상을 잘 바라다보면 우주의 진리와 삶의 이치를 그 속에서 발견하고, 특히 봄이 주는 생명의 기운, 희망의 소식, 거듭남의 이치를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자연에서 읽는 산 경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계절, ‘봄’에 잘 보는 공부를 한다면 봄의 기운을 더 잘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잘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눈으로 겉만 봐서는 안되고 마음으로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풀 한 포기, 작은 풀꽃 하나에서도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봄이 되면 꼭 떠오르는 법문이 있습니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신성품 11장에 “봄바람은 사(私)가 없이 평등하게 불어 주지마는 산 나무라야 그 기운을 받아 자라고, 성현들은 사가 없이 평등하게 법(法)을 설하여 주지마는 신(信) 있는 사람이라야 그 법을 오롯이 받아 갈 수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봄바람이란 우주의 살리는 기운을 말합니다. 겨울에 움츠려 있던 동식물이 봄이 되면 활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봄바람에도 죽은 나무는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합니다. 산 나무라야 그 기운을 받고 새싹을 돋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종자가 남아있어야 소생하듯, 종교인에게는 신(信)이라는 생명의 종자가 남아 있어야 성현의 법(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信), 즉 믿음은 종교인에게 거듭나게 하는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불교 3대 종법사인 대산 종사는 거듭나는 종교 생활을 위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신앙심, 공부심, 공익심, 자비심이 나날이 새로 살아나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이 늘 나날이 새로 살아나고 보면 그 사람은 늘 살아나서 희망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봄’이라는 자연의 경전을 통해 우리는 무슨 지혜를 밝혀야 할까요? 봄의 계절에 참나무의 무성한 연둣빛 새싹을 바라보며, 새로 피어나는 난초를 보며 저는 꿈과 희망을 생각합니다. 산 나무라야 봄기운을 받아 자라듯이 신(信) 있는 사람이라야 성현의 법(가르침)을 받게 된다고 하였지요. 이 봄에 봄으로부터 부지런함을 배우고, 이 봄으로부터 꿈을 지니고, 희망을 배우며, 또 이 봄으로부터 새롭게 거듭남의 지혜를 얻어야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信) 있는 사람이 더욱 그 믿음의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가꾸어 가는 삶이 되어 늘 성현의 가르침이 생활 속에서 활용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3/23/2023
나성인 교무, 휴스턴 교당
코리아월드 칼럼